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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치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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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치안센터 안내

성수치안센터

안녕하세요. 성수치안센터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오수지구대 성수 치안센터 민원담당관입니다. 관내에는 주민 대부분이 농 축산업에 종사하고 있어 농축산물 절도가 우려되는 지역으로 주민여러분과 함께 호흡하면서 농축산물 절도 등 각종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성수 치안센타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민원이라도 내일처럼 도와드리고, 주민 여러분과 함께 편안한 사회를 위한 든든한 치안유지를 위해 항상 노력하겠습니다.여러분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의견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편안하게 방문해 주십시오.
오수지구대 성수치안센터 민원담당관  
관내현황
일반현황표
면적 인구 관할구역
60.4㎢ 1,803명 성수면
주소
  • 전북 임실군 성수면 임진로 176
관광명소
  • 상이암 부도1

    문화재명 : 성수암 부도1
    지정별 : 지방유형문화재 150호
    지정일자 : 1995. 06. 20
    소재지 : 임실군 성수면 성수리 산85
    상이암은 통일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여 도선암 이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리니 후에 왕이 될 것이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여 상이암으로 개명(改名)한 것으로 전하며, 태조3년(1394)에 각여대사가 증수 하였으나 그후 1958년에 중건하였다. 상이암에 안치된 3개의 부도중 2기는 1986년에 이미 문화재 자료 124호로 지정된바 있다. 현 부도는 화강석의 지대석 위에 옥신, 옥개석위에 노반, 노발, 보개등이 얹혀져 있어 형식과 구조, 조각등의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 상이암 부도2

    문화재명 : 상이암 부도2
    지정별 : 문화재자료 124호
    지정일자 : 1986. 09. 09
    소재지 : 임실군 성수리 산 1-1
    상이암은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가야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후 조선 태조3년(1394) 각여선사가 증수하였으나 1894년 동학혁명때 병화를 입었다가 다시 1909년 김대원 선사가 재건하였다. 이 상이암에 있는 해월당 부도와 두곡당 부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는데 해월당 부도는 항아리모양의 몸체위에 8각형의 옥개석을 올리고 그위에 보주를 갖춘 194cm 정도의 높이이다. 두곡당 부도는 석종형 부도로 8각의 하대석위에 교복형으로 된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보주를 얹은 높이 125cm의 부도이다.
  • 이석용 생가

    문화재명 : 이석용 생가
    지정별 : 지방기념물 91호
    지정일자 : 1997. 07. 19
    소재지 :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7-6
    이석용 생가는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석용이 고종15년(1878)에 이 가옥에서 태어나 1903년까지 이 곳에서 거주하다가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로 이전하여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석용은 1907년 9월 12일에 진안의 마이산에서 호남의병장의 동맹단을 결성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36세의 나이로 1914년 4월 4일 대구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 성수산 휴양림

    문화재명 : 성수산휴양림
    任實에서 동쪽으로 8km를 가면 聖壽面 소재지에 이르는데, 이곳은 昭忠祠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의병장 이석용 外 28의사를 모셔놓은 사당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다시 8km 소백산맥의 잔령을 타고 내려오다 長水 八公山과 더불어 서녁으로 양림한 큰산이 바로 성수산입니다. 해발 867m으로 대단히 큰산은 아니로되 그 정상에 四方八方을 관망하노라면 동서남북으로 확트인 시야가 가히 명산이라 아니할 수 없을 만큼 마음가짐이 숙연해집니다. 그 이름이 성인(聖)字에 목숨(壽)字 성수라 함은 가히 역사적 고증을 뒷받침해 줄만 합니다. 聖子는 예로부터 존엄한 임금에게나 붙여진 글자이고 보니 성산 이니, 聖恩이니 하고 이르는 것이 바로 그것인 것 같습니다. 고려朝때 國賓대접을 받았던 풍수도참가, 도선이 이산을 두루 살피고 나서 가로되 『天子奉朝之像에 象峰이 別立하니 次次出現이라. 此山輿則邦家與이요 此山亡則邦家亡이라』하여 크게 탄복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다시 풀이해서 天子를 맞이할 聖地로서 손색이 없다는 도선의 말이라고 합니다.

    道仙이 즉시로 松都로 올라가 草野에묻혀있는 王建에게 聖壽山에 대한 설명과 아울러 백일기도하면 大望을 성취할 것이니 꼭 이를 이행토록 권한 즉 왕건이 기꺼이 이를 수락하고 道仙과 더불어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울렸다는 이야기입니다.(이것은 상이암 사적부원적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왕건은 도선이 가르치는 대로 백일을 기도했으나, 특별한 징후가 나타나지 않자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골짜기에 내려가 바위틈에 흐르는 맑은 물에 목욕재계하고 連3日 기도하였더니, 이상하게도 觀音의 계시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계시가 高麗 建國의 대망을 성취하였다고 합니다. 왕건은 기쁨을 가눌 길 없어 환희 담이라 일필휘지하였고, 도선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 암자를 세워 도선암이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후일 이것이 上耳庵이고, 성수산에는 환희담과 더불어 상이암의 寺蹟의 記錄과 함께 전해지며 이 설화는 당나라 문헌인 당일선사기(唐一禪師記)에 적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고들 합니다. 고려의 왕건이 넓은 바위에 새겨 놓았다는 환희담은 성수산의 實存과 함께 영원히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한편, 고려 왕건의 建國說話]에 이어 朝鮮建國의 太祖 李成桂도 이 성수산에 건국설화를 곁들이고 있습니다.

    그 무렵 國師격인 無學大師가 이성계 장군으로 하여금 성수산의 정기를 터득하고 백일기도를 종용했다는 것입니다. 때마침 이성계는 고려말 6년(1380년)9월 정위원사로 출정, 남원에서 위구를 섬멸하는 大夢을 거두고 개선 길에서 無學大師의 가르침을 결행하게 된 것이었는데 이성계는 發龍의 大夢을 이곳 성수산에서 꾸고 朝鮮建國의 大望을 풀었다는 설화를 남긴 것입니다. 그 꿈인 죽 용이 나타나 이성계의 몸을 세 번 씻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꿈은 그가 운봉 출전 前後에 섯가래 셋을 지었다는 꿈과 함께 필시 頭戰冠昇人大海의 龍床에 드는 大夢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 이성계는 또한 왕건이 환희담이라 친필 했듯이 그곳에 삼청동이라 명명하고 이를 돌에 친필 하였습니다. 결국 이성계도 성수산의 정기를 터득하여 朝鮮建國의 대업을 성취한 것입니다. 그 후 이성계는 등극 후 이 암자의 이름을 상이암이라 개명하고 이 곳에서 어필학을 지어 그 안에 삼청동이라는 자기의 친필을 보관케 한 것이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이렇듯 성수산은 名山中에 名山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숲이 울창하고 산허리를 타고 흐르는 계곡의 물 또한 맑아 과히 측량수라 칭찬할 만 합니다.

    결국 성수산의 건국 說話와 환희담, 三淸洞의 實存 유물들이 어떤 역사적 硏究資科로 究明되어야 할 必要가 있기에 이 고장의 名山 성수산의 개요를 소개하는 바입니다. 더욱이 성수산은 李錫義兵將의 救國투쟁 擧事의 本據地로 더욱 意味있는 곳이며, 상이암은 의병 倡義同盟의 총 本部로 쓰여진데 對하여 任實郡民으로서는 가슴속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수산 일우에서 『正氣丹心歌共照 竹橋 市烈同聲』라는 글과 함께 『潮南義兵 倡義同盟壇』이라는 깃발의 환영을 보며 그날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소리내어 외쳐봅니다. 正義 一片丹心노래는 선죽교의 절개되어 함께 메아리치니, 현재 성수산은 자연 휴양림으로 지정 많은 휴양객들이 찾아 들고 있다.
  • 소충사

    문화재명 : 소충사
    소충사는 임실역에서 남원쪽으로 1.5km지점 신촌마을에서 동쪽으로 꺾어3km쯤 가면 성수면 소재지에서 장수 산서방향으로 2km정도 가면 소충사가 나온다.

    소충사는 구한말 정재 이석용장군을 주변으로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28의사를 배향하는 사우(祠宇)로서 전북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산130-1번지일원에 부지20,300평에 분묘2기,사당20평,기념관43평,관리사20평 등의 시설을 2,365백만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1992년∼2002.11월까지 조성하여 항일투쟁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순절하신 충의열사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시설한 곳으로 항일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많은 참배객이 다녀가고 있는 임실군의 대표적인 보훈시설이다.

    정재 이석용의병장은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나 17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한 출충한 인물이였으나 을사조약으로 일제가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자 성수산 골짜기의 상이암에 동지를 규합하여 1907년 8월 28일 마이산에서 「호남의병장의 동맹단」을 결성하여 의병장으로 추대 되었는데 당시 의병의 수가 5백여명에 이르렸다. 그후 2년에 걸쳐 진안에 주둔한 왜군을 격파하고 영광,고창,용담 등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군에 당하지 못하고 1908년 4월 임실에서 크게 패하자 의병들을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후 정동석의 배반으로 1913년 일경에 체포되어 1914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37세를 일기로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였다. 정부는 1962년 3월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매년 7월7일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1957년 7월 이승만대통령의 소충사(昭忠祠)휘호와 이박사 친제의「조의단(弔義壇)28의사 추념문」을 받아 비에 새겨 놓았다. 지의동(知義洞)과 동룡동(東龍洞)에 있는 28의사의 묘소는 1988년 5월 18일 성수면 오봉리 산1번지로 임시 합장하였다가 1995년 11월 독립유공자를 위해 성역화사업으로 조성한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 130-1번지 소충사에 안장 하였으며, 정재 이석용장군의 묘도 전남 영암군 월출산에서 같은해 유족들의 천묘로 28의사와 함께 소충사에 안장 되었다.

    임실군에서는 충.효.열의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임실군민의날 행사를 소충제라 정하여 매년 개최하다가 사선녀의 아름다운 전설을 바탕으로한 지역문화행사인 사선문화제와 1999년8월에 통합한 소충.사선문화제를 매년 양력 10월5일을 전후하여 관촌사선대 및 임실군 일원에서 개최하고 있으며 이때 소충사를 찾아 헌화 분향하고 충의열사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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